초대 달라이 라마 게둔 둡빠(Gedun Drupa)
제1 대 달라이 라마, 게둔 둡빠는 1391년 티베트 중부 짱(Tsang) 지역 싸꺄(Sakya) 근처에 있는 규르메 루파(Gyurmey Rupa)에서 유목민 부부인 곤뽀 돌제(Gonpo Dorjee)와 조모 남카 끼(Jomo Namkha Kyi)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빼마 돌제(Pema Dorjee)이며, 티베트어 읽기, 쓰기에 대한 기초 교육을 갸똔 쩬다 빠-라(Gya-Ton Tsenda Pa-La)에게 받았다. 14세 되던 해에 냐탕(Narthang) 사원의 주지, 켄첸 둡빠 셰랍(Khenchen Drupa Sherab) 문하로 출가를 하여 게둔 둡빠라는 법명을 받았다. 그 뒤 1411년에 켄첸 둡빠 셰랍으로부터 비구계(겔롱Gelong)를 받아 정식으로 승려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겔룩파(Gelugpa)의 창시자인 큰 스승 쫑카파(Tsongkhapa)를 존경했던 게둔 둡빠는 1416년에 쫑카파의 제자가 된다. 쫑카파를 향한 깊은 충심과 헌신으로 스승의 마음을 움직여 수제자로 인정받았으며, 스승은 제자 게둔 둡빠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티베트 전역에 전파하라는 의미로 새 법복을 하사했다. 1447년, 게둔 둡빠는 겔룩파 최대 불교 대학인 따시 룬포(Tashi Lhunpo) 사원을 시가체(Shigatse)에 설립한다.
1 대 달라이 라마 게둔 둡빠는 이론과 실천 그리고 수행을 겸비한 뛰어난 학자이자 수행자로 유명하며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여덟 권이나 저술하여 부처님의 가르침과 철학에 대해 스스로 깨달은 바를 후대에 남겼다. 84세가 되던 해인 1474년, 따시 룬포 사원에서 명상을 하던 중 열반에 들었다.
제2 대 달라이 라마 게둔 갸초(Gedun Gyatso)
제2 대 달라이 라마 게둔 갸초는 1475년 티베트 중부 창 지역의 시가체 근처, 따낙 쎅메(Tanag Sekme)에서 농부 꾼가 갸초(Kunga Gyaltso)와 마찍 꾼가 빼모(Machik Kunga Pemo)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닝마파 전통을 따르는 유명한 탄트라 수행자였다. 게둔 갸초는 처음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부모에게 자기 이름이 빼마 돌제(Pema Dorjee, 1대 달라이 라마의 출생 시 이름)이며 타시 룬포 사원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게둔 갸초를 잉태했을 때 아버지 꿈에 하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 ‘아들이 전생을 기억하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며, 이름을 게둔 둡빠로 지으라고 했으나 아들의 이름을 쌍게 뺼(Sangye Phel)로 지었다.
어린 쌍게 뺼은 아버지에게서 기초 교육을 받았고 11세에1 대 달라이 라마 게둔 둡빠의 환생으로 인정받아 따시 룬포 사원에서 공식적으로 달라이 라마로 추대되었다. 1486년 판첸 룽릭 갸초(Panchen Lungrig Gyatso)에게서 계를 받고, 최제 최키 걀첸(Choje Choekyi Gyaltsen)에게서 비구계와 게둔 갸초라는 법명을 받는다. 따시 룬포와 데붕(Drepung) 사원에서 수학했다.
1517년에 데붕 사원 주지가 된 게둔 갸초는 대규모 기도 법회인 몬람 첸모(Monlam Chenmo)를 부활하고 겔룩파의 3대 불교 대학인 세라(Sera), 데붕(Drepung), 간덴(Gaden) 사원의 스님들과 함께 이 행사를 직접 주관했다. 1525년 세라 사원 주지가 되었으며 1542년 67세에 열반했다.
제3 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Sonam Gyatso)
제3 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는 1543년 라싸(Lhasa) 근처 토룽(Tolung)에 있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인 남걀 닥빠(Namgyal Drakpa)와 뺄좀 부띠(Pelzom Bhuti)는 자식을 여럿 두었으나 모두 어린 나이에 죽었다. 새로 태어난 자식마저 같은 불행을 겪지 않도록 부모는 염소 젖으로 아이를 키웠으며, 이름을 '염소 젖이 지킨 큰 인물'이라는 뜻의 라누 시초 펠장(Ranu Sicho Pelzang)으로 지었다.
세 살이 되던 1546년, 티베트의 통치자 소남 닥빠 걀첸(Sonam Dakpa Gyaltsen)과 판첸 소남 닥빠(Panchen Sonam Dakpa)에게 게둔 갸초의 환생으로 인정받았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축복을 받으며 데붕 사원에 화려하게 입성하고 공식적으로 달라이 라마로 추대된 그는 세속의 삶을 등진다는 의미로 삭발을 하였다. 7세 때 소남 닥빠의 사미가 되면서 소남 갸초라는 법명을 받았다. 22세 되던 해에 게렉 뺄상(Gelek Palsang)으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1552년에 소남 갸초는 데붕 사원 주지로 취임하고, 1558년에는 세라 사원 주지가 되었다. 1574년에는 종교적 소임을 보좌할 펜데 렉셰 링(Phende Lekshe Ling)을 설립하였다. 이 기관은 현재 남걀 사원의 전신이며 지금도 달라이 라마 전용 사원으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몽골 왕, 알탄 칸(Altan Khan)이 티베트 법왕에게 '지혜의 바다'라는 의미인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도 소남 갸초 시대 일이다. 이에 대한 답례로 달라이 라마는 알탄 칸에게 '종교의 왕'이라는 뜻의 '브라흐마'라는 칭호를 주었다. 쫑카파가 탄생한 곳에 쿰붐(Kumbum) 사원과 캄(Kham)에 리탕(Lithang) 사원을 세운 사람도 3 대 달라이 라마이다. 몽골에서 가르침을 펼치던 중 열반했다.
제4 대 달라이 라마 욘텐 갸초(Yonten Gyatso)
제4 대 달라이라마 욘텐 갸초는 1589년 알탄 칸의 손자이자 초칼(Chokar) 부족의 수장인 출팀 최제(Tsultrim Choeje)와 두 번째 부인인 파켄 눌라(PhaKhen Nula) 사이에서 태어났다.
티베트 신탁들의 예언과 출생 당시의 상서로운 징조를 바탕으로 간덴 사원의 주지 스님이 이 아이를 3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공식 인정하고 욘텐 갸초라는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아이 부모는 아들이 일정 나이가 될 때까지 직접 키우겠다고 하여 몽골에서 티베트 고승(라마)으로부터 불교 기초 교육을 받았다.
1601년, 12세가 되던 해에 욘텐 갸초는 아버지와 간덴 사원의 전 지도자인 쌍갸 린첸(Sangya Rinchen)을 대동하고 티베트로 갔다. 쌍갸 린첸은 욘텐 갸초에게 계를 준 계사이기도 하다. 26세가 되던 1614년에 제4 대 판첸 라마 롭상 최걀(Lobsang Choegyal)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그 후 데붕 사원과 세라 사원 주지가 되었고, 1617년 29세에 데붕 사원에서 열반했다.
제5 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Lobsang Gyatso)
제5 대 달라이 라마 롭상 갸초는 1617년 라싸 남쪽에 있는 로카 칭왈 탁체(Lhoka Chingwar Taktse)에서 두둘 랍뗀(Dudul Rabten)과 꾼가 한제(Kunga Lhanzi)사이에서 태어났다.
4 대 달라이 라마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소남 초펠(Sonam Choephel)이 특별한 재능이 있는 총갸(Chong-Gya) 소년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가 전대 달라이 라마가 사용했던 물건들을 보여 주었다. 소년은 단번에 알아보고 ‘자기 것’이라 했다. 당시 티베트는 정치적 혼란기에 있었기 때문에 소남 최펠은 5 대 달라이 라마를 찾아낸 사실을 비밀에 붙였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5대 달라이 라마를 데붕 사원으로 모시고 왔다. 4대 판첸 라마 롭상 초걀에게서 계와 함께 아왕 롭상 갸초(Ngawang Lobsang Gyatso)라는 법명을 받았다.
5 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가 정치적 격동기를 겪는 상황에서 확인되었지만 1642년에 쿄쇼트 몽골(Qoshot Mongol)의 왕, 구쉬르 칸(Gushir Khan)에 의해 불안정한 정국이 정리되면서 시가체의 중심 사원에서 종교와 정치를 아우르는 명실공히 티베트의 최고 지도자로 정식 추대된다. 1645년에 5 대 달라이 라마는 간덴 포당(Gaden Phodrang)의 고위 관료들과 회동을 갖고 레드힐(Red Hill)에 포탈라 궁을 건립할 것을 논의한다. 레드힐은 티베트 33대 왕인 송첸 감포가 레드포트를 지은 곳이다. 그 해 짓기 시작한 포탈라 궁은 완공까지 43년이 걸렸다.
1649년 만주족 황제인 순치(Sunzhi)는 달라이 라마를 북경으로 초청한다. 달라이 라마가 중국의 닝시아(Ningxia) 성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문무 관리들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마중을 나와 티베트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를 영접을 하고 호위를 했다고 한다. 북경에 있던 황제도 직접 코톨(Kothor)이라는 곳으로 와서 달라이 라마를 맞이했다. 북경에서 머무는 동안에는 황제가 달라이 라마를 위해 지은 황궁(Yellow Palace)에 머물렀다. 달라이 라마와 만주 황제가 공식적으로 만났을 때 두 지도자는 칭호를 교환했다고 한다. 1653년에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로 돌아왔다.
1655년 구쉬르 칸(Gushir Khan)과 섭정인 소남 초펠이 세상을 떠나자 달라이 라마는 구쉬르 칸의 아들인 텐진 돌제(Tenzin Dorjee)를 새로운 몽골 왕으로 추대하였고, 독 메-빠 틴레 갸초(Drong Mey-Pa Thinley Gyatso)가 차기 섭정을 맡았다. 한편, 만주족 황제도 1662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 강희제(K'ang-si)가 황위를 물려받았다. 그 해에 판첸 라마도 91세로 열반에 들었다. 1665년에 달라이 라마는 따시 룬포 사원의 요청으로 창(Tsang) 지역에서 태어난 소년을 전대 판첸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하고 롭상 예시라는 이름을 내렸다.
5대 달라이 라마는 산스크리트 어에 정통한 뛰어난 학자이며 시집 한 권을 비롯한 많은 저서를 남겼다. 또한 관리를 양성하는 학교와 성직자를 양성하는 학교를 설립하여 몽골어, 산스크리트어, 천문학, 시, 경영에 대해 가르치도록 했다. 말수가 적은 그의 발언은 항상 신중했고 티베트 주변국 통치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죽음을 일정 기간 세상에 알리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신임 섭정인 쌍갸 갸초(Sangya Gyatso)에게 포탈라 궁 건립에 대한 책임을 맡긴 5대 달라이 라마는 포탈라 궁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682년 65세에 열반했다.
제6 대 달라이 라마 창양 갸초(Tsangyang Gyatso)
제6 대 달라이 라마 창양 갸초는 1682년 몬 따왕(Mon Tawang), 현재 인도 아루나찰 프라데시)에서 따시 텐진(Tashi Tenzin)과 체왕 하모(Tsewang Lhamo)의 아들로 태어났다.
포탈라 궁 건립을 마무리하기 위해 섭정인 상게 갸초는 5대 달라이 라마가 당부한 대로 15년 동안 죽음을 비밀에 붙였다. 사람들은 위대한 5대 달라이 라마가 오랫동안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면 달라이 라마의 의례용 법복을 권좌에 올려 두었다. 몽골 왕자가 달라이 라마의 대중 법회를 강력하게 요구할 때에는 데파 데랍(Depa Deyrab)이라고 하는 남걀 사원의 노스님이 달라이 라마로 분장을 하고 법석에 앉았다. 이 노스님은 달라이 라마를 닮기는 했지만 달라이 라마의 날카로운 눈매를 갖추고 있지 못해 이를 감추기 위해 모자를 쓰고 눈썹을 그렸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달라이 라마의 죽음을 철저히 감춰 오던 섭정은 몬 지역에 사는 소년이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리고 1688년 믿을 만한 신하를 보내 소년을 라싸 근처 난칼체(Nankartse) 로 데려오게 한다. 전담 교사를 지정하여 몬에서 온 소년을 교육시키고, 1697년에 고위 관리인 샵둥 아왕 쇼누(Shabdrung Ngawang Shonu)를 만주로 보내 황제 강희제에게 5대 달라이 라마의 죽음과 6대 달라이 라마의 발견을 알린다. 그리고 티베트 국민들도 이 소식을 듣고 5대 달라이 라마께 감사하는 동시에 기쁘게 6대 달라이 라마를 맞이했다. 태양이 지는 것을 보고 슬퍼하는 대신 다시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기뻐할 수 있도록 해 준 섭정에게도 감사했다.
섭정은 티베트 종교 지도자 가운데 서열 2위인 제5 대 판첸 라마 롭상 예시를 난칼체로 초청해 6대 달라이 라마를 사미로 출가하도록 하고 창양 갸초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14세가 되던 1697년, 3대 사원인 세라, 간덴, 데붕을 대표하는 티베트 내 주요 인사들, 몽골 왕자, 강희제가 보내 사신, 그리고 라싸에 거주하는 대중들이 참석한 대규모 의식을 통해 6대 달라이 라마로 정식 추대되었다.
1701년에는 섭정인 상게 갸초와 구쉬르 칸의 후계자인 라상 칸 사이에 갈등이 있었고 결국 라상 칸이 섭정인 상갸 갸초를 살해한다.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어린 달라이 라마는 수행자로서 받아야 할 공부를 등지고 세속적인 삶에 빠져든다. 그리고 비구계를 거부한다. 실제로 그는 시가체에 있는 판첸 라마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사미계를 저버리겠다고 선언한다. 포탈라 궁에서 계속 거주하기는 했으나 라싸 시내와 마을 주변 배회하며 낮에는 포탈라 궁 뒤에 있는 공원에서 속인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라싸 시내와 숄(Shol, 포탈라 궁 아래에 있는 동네)에 있는 술집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6대 달라이 라마는 훌륭한 시인이자 작가로 멋진 시 여러 편을 남기기도 했다. 25세인 1706년에 중국으로 초청을 받아 가던 중 사망했다.
제7 대 달라이 라마 깰상 갸초(Kelsang Gyatso)
티베트 사람들은 창양 갸초가 시를 통해 자신이 캄 지방의 리탕에서 다시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고 믿었다.
백로여, 그대 날개를 빌려다오,
리탕까지만 날아가고자 하니.
그곳에서 다시 돌아오리라!
이 예언을 입증하듯 6대 달라이 라마가 떠난 지 2년 후인 1708년에 리탕에서 소남 달갸(Sonam Dargya)와 롭상 초초(Lobsang Chotso)의 아들로 7대 달라이 라마가 태어났다.
3대 달라이 라마가 리탕에 세운 툽텐 잠펠링(Thupten Jampaling) 사원은 아이 한 명이 보여준 경이로운 일로 들썩댔고 신탁 예언가들 또한 새로 태어난 이 아이가 6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일 것이라고 했다.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여 새 달라이 라마를 라싸로 데려가지는 못하고 쿰붐 사원에 모셔 아왕 롭상 텐페 걀첸(Ngawang Lobsang Tenpai Gyaltsen) 아래서 출가하도록 했다.
1720년에 포탈라 궁에 입성하였고 판첸 롭상 예시(Panchen Lobsang Yeshi)에게서 계와 함께 깰상 갸초라는 법명을 받았다. 1726년에 판첸 린포체로부터 상서로운 달인 ‘사카 다와(Saka Dawa)’에 비구계를 받는다. 규르메(Gyumey) 사원 주지 판첸 롭상 예시(Panchen Lobsang Yeshi)와 살루(Shalu) 사원의 주지 아왕 욘땐(Ngawang Yonten)에게 가르침을 청해 불교 철학 전반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며, 경전과 탄트라를 통달한다.
43세 되던 1751년에 티베트 정부에 까샥(Kashag)이라고 하는 새로운 부서를 설립하고,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권한이 집중되어 있어 비판을 받아오던 섭정 제도를 폐지한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가 종교와 정치를 아우르는 티베트의 최고 지도자가 된다. 45세 때 포탈라 궁에 체 학교(Tse-School)를 설립하고 놀링 깰상 포당(Norling Kalsang Phodrang)이라는 궁전을 새로 짓는다. 7대 달라이 라마는 뛰어난 학자로서 특히 탄트라에 관한 저서를 많이 남겼다. 또한 6대 달라이 라마인 창양 갸초와는 달리 위대한 시인으로서 마음의 문제를 일관성 있게 중심 주제로 다루었다. 소박하고 청렴하게 산 7 대 달라이 라마는 모든 티베트 사람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았다. 1757년에 열반에 들었다.
제8 대 달라이 라마 잠뺄 갸초 (Jamphel Gyatso)
제8 대 달라이 라마 잠뺄 갸초는 1758년 티베트 서남부 창 지역의 라리 강(Lhari Gang)에 있는 똡걀(Thobgyal)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소남 달게(Sonam Dhargye)과 어머니 푼촉 왕모(Phuntsok Wangmo)는 캄 지역 출신으로 게살(Gesar) 시대의 전설적인 영웅 드랄라 체걀(Dhrala Tsegyal)의 후예들이다.
푼촉 왕모가 잠뺼 갸초를 잉태를 할 무렵, 라리 강 지역엔 예년과 달리 보리 이삭이 네댓 배나 더 달리는 유래 없는 대풍년을 맞았다. 또 푼촉 왕모가 친척들과 함께 정원에서 밥을 먹는데 엄청나게 큰 무지개가 떴고, 무지개 한쪽 끝이 그녀의 어깨에 닿았다고 한다.(이런 현상은 예로부터 매우 상서로운 징조로 보고 대성인 탄생과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잠뺄 갸초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미소 띤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였다. 또 명상하는 자세인 연화좌로 앉으려고 애쓰는 모습도 보였다. 6대 판첸 라마 빨덴 예세는 이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확실한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다."라고 단언했다고 한다.
잠뺄 갸초는 말을 막 할 무렵 "세 살이 되면 라싸로 간다."라고 말했다. 티베트 사람 그 누구도 이 아이가 8대 달라이 라마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7대 달라이 라마의 수석 보좌관이었던 닥빠 타예(Darkpa Thaye)는 고승들과 티베트 정부 관리들로 구성한 대표단을 이끌고 라싸로 와서 생후 2년 6개월된 소년을 시가체에 있는 따시 룬포 사원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달라이 라마 공인 의식을 가지면서 판첸 라마가 잠뺄 갸쵸라는 법명을 준다.
어린 잠펠 갸초는 1762년에 호위대 행렬을 이끌고 라싸에 입성하고 포탈라 궁에서 티베트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된다. 추대 의식은 어린 달라이 라마를 대신해 정치적인 실무를 맡은 최초의 섭정, 데모 뚤꾸 잠뺼 예시(Demo Tulku Jamphel Yeshi)가 주재했다. 7살이 되던 해 판첸 라마로부터 사미계를 받았고 1777년에 비구계를 받았다. 8대 달라이 라마는 영적으로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라싸 외곽에 있는 유명한 노블링카 정원(Norbulingka Park)과 여름 궁전도 지었다. 1804년, 47세에 열반했다.
제9 대 달라이 라마 룽똑 갸초(Lungtok Gyatso)
제9 대 달라이 라마 룽똑 갸초는 1805년 캄 지역에 있는 단 최콜(Dan Chokhor)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텐진 최굥(Tenzin Choekyong)과 돈둡 돌마(Dhondup Dolma) 사이에서 태어났다.
1807년에 8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받고 대규모 축하 행사가 봉행되는 가운데 라싸로 왔다. 1810년에 포탈라궁에서 티베트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판첸 라마로부터 계와 함께 룽똑 갸초라는 이름을 받았다. 1815년,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인 아홉 살에 세상을 떠났다.
제10 대 달라이 라마 출팀 갸초(Tsultrim Gyatso)
제10대 달라이 라마 출팀 갸초는 1816년 캄 지역 리탕에서 롭상 닥빠(Lobsang Dakpa)와 남걀 부띠(Namgyal Bhuti) 사이에서 태어났다.
1822년에 달라이 라마 환생으로 인정받아 포탈라 궁에서 정식으로 추대되었고, 그 해에 판첸 라마 땐뻬 니마(Tenpai Nyima)로부터 사미계와 함께 출팀 갸초라는 이름을 받았다. 10세가 되던 1826년에 데붕 사원에 적을 두고 다양한 불교 철학을 공부하고 경전과 탄트라 수행을 숙지했다. 19세가 되던 1831년에 포탈라궁을 재건하고 판첸 라마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 몸이 유난히 약했던 제10 대 달라이 라마는 안타깝게도 1837년 2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제11 대 달라이 라마 케둡 갸초(Khedrup Gyatso)
제11 대 달라이 라마 케둡 갸초는 1838년 캄 지역 민냑(Minyak)에 있는 가탈(Gathar)에서 체땐 돈둡(Tsetan Dhondup) 과 융둥 부띠(Yungdrung Bhuti) 사이에서 태어났다.
1841년에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았으며 판첸 라마 땐뻬 니빠(Tenpai Nyipa) 아래로 출가하면서 케둡 갸초라는 법명을 받았다. 11세 되던 1842년에 포탈라궁에서 티베트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판첸 라마로부터 사미계를 받았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티베트 사람들 바람에 부응하여 티베트 영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책임을 완수했다. 그러나 1856년에 포탈라궁에서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제12 대 달라이 라마 틴레 갸초 (Trinley Gyatso)
제12 대 달라이 라마 틴레 갸쵸는 1856년 라싸 근처에 있는 호카(Lhoka)에서 푼촉 체왕(Phuntsok Tsewang)과 체링 유돈(Tsering Yudon) 사이에서 태어났다.
1858년 어린 나이에 달라이 라마로 인정받아 라싸로 왔으며 섭정을 맡고 있던 레팅 아왕 예시 출팀 걀첸(Reting Ngawang Yeshi Tsultrim Gyaltsen)에게서 툽텐 갸초(Thupten Gyatso)라는 이름을 받았다. 1860년, 다섯 살에 간덴 사원 주지인 롭상 켄랍(Lobsang Khenrab)에게 사미계를 받고 포탈라궁에서 티베트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8세 되던 1873년에는 티베트 영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책임을 완전히 맡았다. 1875년 20세에 포탈라 궁에서 숨을 거두었다.
제13 대 달라이 라마 툽땐 갸초 (Thupten Gyatso)
제13 대 달라이 라마 툽떈 갸초는 티베트가 격동기를 맞고 있던 1876년에 티베트 중부 탁포(Thakpo) 지역의 닥포(Dagpo)에 있는 랑둔(Langdun)에서 농부인 꾼가 린첸(Kunga Rinchen)과 롭상 돌마(Lobsang Dolma) 사이에 태어났다.
신탁 예언자 네충(Nechung)의 예언과 고향 마을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가 있은 후, 1877년에 12대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는 바로 라싸로 모셔졌다. 1878년 8대 판첸 라마 땐뻬 왕축(Tenpai Wangchuk)이 삭발 의식을 거행하면서 아왕 롭상 툽땐 갸초 직델 촉레 남걀(Ngawang Lobsang Thupten Gyatso Jigdral Chokley Namgyal)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였다. 1879년, 포탈라궁에 있는 중앙 영접실에서 티베트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 해에 달라이 라마의 섭정인 따착 린포체, 아왕 빨덴 예시(Ngawang Palden Yeshi)에게서 우바이계 (Upasaka, 티베트어로는ge-nyen)를 받았다. 6세 되던 1882년, 다시 타착 린포체에게서 공식적으로 사미계(티베트어 ge-tsul) 를 받았다.
1895년에는 라싸의 조캉(Jokhang) 사원에서 전담 지도 교사인 푼촉 아왕 잠빠(Phurchok Ngawang Jampa)린포체로부터 비구계(티베트어 ge-long)를 받았다. 푼촉 아왕 잠빠 린포체는 툽땐 갸초의 개인 지도 교사로서 공식 절차를 주관했다. 링 린포체 롭상 룽똑 텐진 틴레(Lobsang Lungtok Tenzn Thinley)와 간덴 사원의 주지, 비밀 특사로 활동하던 승려(Secret Inquiry Master) 등 당대의 저명한 불교 스승들이 대거 참여해 달라이 라마에게 계를 주는 의식에서 푼촉을 도왔다. 1895년 9월 27일, 마침내 티베트의 영적 정치적 지도자로 추대되고, 차르가 이끄는 러시아와 영국 지배 하에서 제국의 영토 확장 일선에 있던 인도 사이의 거친 분쟁 한복판에 내던져졌다. 1904년에 영국의 침략을, 1909~1910년에는 중국의 침략을 이겨내면서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강력한 지도력을 갖게 되었다.
중국의 만주군을 이끄는 장군, 루찬(Lu Chan)이 라싸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달라이 라마는 핵심 각료들과 함께 라싸를 떠나 인도로 넘어갔다. 도모(Dromo)를 건넌 달라이 라마 일행은 티베트와 씨킴의 경계에 있는 젤렙-라 고개(Jelep-la Pass)에서 중국 침략자들과 협상을 벌였다.
그리고 1911년, 만주 왕조가 무너지면서 티베트 사람들은 마침내 만주군 잔당들을 티베트에서 몰아내게 된다. 다시 티베트로 돌아온 달라이 라마는 5대 달라이 라마 시절 이후에 볼 수 없었던 유래 없이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한다. 티베트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티베트 사원의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면들을 타파하는 등 사원 체계도 적극적으로 개선하였다. 인도로 피신해 있던 시절 달라이 라마는 현대화된 세상에 크게 매료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티베트 역사상 처음으로 지폐와 동전을 도입한다. 1913년 2월 13일에는 티베트가 독립 국가임을 세계 만방에 재차 강조하는 5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또 그 해에 처음으로 우체국을 설립하고, 티베트 젊은이 4명을 영국으로 보내 과학 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다.
1914년에는 티베트 군대를 위한 특별 훈련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군사력 강화에 힘쓰기 시작했다. 1917년, 티베트 의학 및 천문학 학교인 멘찌캉(Men-Tsee-Khang)을 라싸에 설립하여 티베트 전통 의학과 천문학 체계를 보존할 수 있도록 했다. 멘치캉에서는 젊고 똑똑한 학생 100여 명을 선발하여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1923년에는 티베트 안보와 국민들 안위를 지키기 위해 라싸에 경찰 본부를 설립하고, 티베트 최초 영어 학교를 걀체(Gyaltse)에 설립하였다. 안타깝게도 13대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근대화라는 과업을 미처 다 이루지 못하고 1933년 58세에 열반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