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들어주는 보석보다 더 소중한
모든 존재를 위하여
최상의 목표를 성취하고자 하니
언제나 제가 그들을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이 게송은 ‘모든 중생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핵심은 중생을 삼보와 같이 귀중한 존재로 인식하는 태도를 개발하라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왜 우리가 다른 중생을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중생은 일상적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기쁨과 행복 그리고 풍요의 진정한 근원이라 할 수 있다. 매일 마주하는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가 바라고, 얻고자 하는 경험들은 다른 중생들과 협력하고 상호 작용을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수행자 관점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높은 수준의 깨달음과 영적인 여정에서 이루는 모든 성취 역시 다른 중생과 협력하고 상호 작용을 할 때 가능하다. 더욱이 최종 보리심 단계에서는 중생을 향한 진정한 자비행이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은 후에 일어나는 행위의 대상이 바로 중생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는 다른 중생은 기쁨과 풍요, 행복의 참된 근원이다. 의식주와 같은 기본적인 기쁨과 안락은 모두 다른 중생들에게 달려 있다. 명성과 명망도 마찬가지다. 안락함과 안전함은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인식과 호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이 베푸는 호의는 우리 생존의 근간이라 볼 수 있다. 우리 삶은 타인의 보살핌 없이 시작될 수 없으며, 적절한 성장도 어렵다. 다른 사람을 배려할수록 고요한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여러분의 만족감은 높아질 것이다. 내 생각에 여러분이 배려심을 갖는 그 순간, 다른 사람들이 보다 긍정적인 존재로 보일 것이다. 이는 여러분의 태도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반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한다면 그들은 여러분에게 부정적인 존재로 비춰질 것이다. 또 하나 매우 확실한 것은 여러분이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 사고의 초점은 편협해지고, 이 편협해진 사고는 많은 불편함을 느끼게 할 것이며, 여러분을 두렵고 불안하고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이 타인에 대한 배려심을 갖는 순간 여러분의 사고는 넓어진다. 넓은 시각으로 볼 때 여러분 자신의 문제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이것은 큰 차이를 만든다. 여러분이 타인에 대해 배려하는 마음이 있으면 여러분은 자신이 처한 힘든 상황과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의 힘이 드러나게 된다. 이 내면의 힘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사소하고, 때에 따라서는 골치가 덜 아픈 것으로 만들 것이다.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뛰어넘어 타인을 배려함으로써 여러분은 내적인 힘과 자기 확신, 용기, 그리고 더 커진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 이는 개인의 사고 방식이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에 대한 분명한 예라 할 수 있다.
『입보리행론』에서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느끼는 고통과 자기 자신의 고통을 직접 느낄 때 고통은 현상학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낄 때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공유하는 것이므로 불편함이 따른다. 하지만 샨티데바가 지적했듯이 이때는 고통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일정 부분 안정감도 있다. 타인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자발적으로 참여했기에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과 확신도 내재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할 때에는 비자발적인 요소가 관여한다. 당사자 입장에서 통제할 수 없기에 여러분은 무력해지고 상황에 완전히 압도된다. 이타심과 자비심에 관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자기자신의 행복을 무시하고 타인의 행복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괴로움을 자발적으로 나누는 수행에 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 핵심은 여러분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보살피는 마음을 키울 바탕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 모든 공덕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친절한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사실에 기초해야만 한다. 즉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 기본 개념이 우리 자신에게 적용이 된다면 다른 중생들에게도 확대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행복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소중히 하라.”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자비심의 이상에 따라 스스로를 훈련하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행동이 다른 중생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무시하는 자기 중심적 사고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 행복, 성공에 다른 중생의 호의가 작용한다는 것을 인식하면 그들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 이것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다. 두 번째로 고려할 것은 다음과 같다. 분석과 사유를 통해 여러분은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절망, 고통, 아픔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희생시키면서 얻은, 자신의 행복만을 소중히 여기는, 이기적인 사고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반면, 우리 삶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기쁨과 행복, 안정감은 다른 중생들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과 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서로 상반되는 이 두 가지 형태의 생각과 감정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소중히 여기는 생각과 감정 배양과 관련된 또 다른 사실이 있다. 개인의 사리사욕과 소망은 실제로 다른 중생을 위해 일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서 충족되는 것이다. 쫑카파의 위대한 저서 『보리도차제론 Great Exposition of the Path to Enlightenment (Lamrim Chenmo)』에서 “수행자의 생각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소망 역시 하나의 부산물로 별도 노력 없이도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내가 자주 언급하는 내용이라 이미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살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길을 따르는 자비심이 있는 수행자들은 현명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반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어리석게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그 결과로 우리는 항상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이제는 보다 현명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믿는다. 문득 이런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진정 우리는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을까?”
작은 내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 확신한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묘한 것이다. 때때로 이 마음이라는 것은 매우 완고하고 바꾸기가 어렵다. 하지만 합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확신과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우리 마음은 매우 정직해지기도 한다. 진정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다면 우리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단순한 기원과 기도만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지만 경험을 바탕으로 근거와 확신이 있다면 마음은 바꿀 수 있다. 여기서 시간은 매우 중요한 요소다. 시간이 흘러야 우리 정신적 태도는 확실히 변할 수 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스스로를 아주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실용성에 집착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중생의 행복을 기원하고 모든 중생의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일으킨다는 생각이 현실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위해 전혀 노력을 하지 않으며, 마음 수련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과 직접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삼아 시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들은 시간 지나면서 관계의 범위를 차차 넓혀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셀 수 없이 많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이 지구상에서 자신 주변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유대감을 느끼겠지만 다양한 세계와 우주에 편재한 무한한 중생이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살아 있는 모든 생물체를 마음으로 품으려고 애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일면 타당한 이의제기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이타심을 일으키려고 노력할 때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로 공감의 범위를 넓히려고 노력하다 보면 고통을 느끼고 행복을 경험하는 폭이 더 커지는 방향으로 삶의 형태를 확장할 수 있다. 이 때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중생으로 정의된다. 이 중생의 개념은 매우 강력하며, 특정 기준에 따라 살아 있는 생명체 하나하나를 모두 식별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상의 보편적 속성을 예를 들자면, 우리가 모든 사물과 사건들이 무상하다는 생각을 키워 갈 때 무상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마음은 그렇게 작용하지 않는다. 이 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번째 게송, “언제나 내가 모든 중생들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라는 부분에서 ‘나’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이 단계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와 여러분 또 다른 사람들을 포함해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우리는 보통 말을 할 때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본다.” 또는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듣는다.”와 같이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다. 우리는 일상적인 삶에서 ‘나’가 존재하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자아’ 혹은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하려고 할 때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일상의 삶을 넘어 분석을 확장할 수 있는데, 가령 어린 시절 자신을 떠올려볼 수 있다. 어린 시절 떠올릴 때 여러분은 당시 육체적 상태와 어린 시절 ‘나’라는 감각을 밀접하게 느낄 것이다. 어렸을 때도 ‘나’가 있었고, 나이가 든 지금의 ‘나’가 있다. 두 시기에 걸쳐 있는 ‘나’도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젊은 날의 경험과 노년의 경험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육체적 상태와 ‘나’라는 감각, ‘나’라는 의식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철학자들, 특히 종교 사상가들이 시간이 지나도 연속성을 유지하는 ‘자아’ 혹은 ‘나’라는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인도는 전통적으로 이를 중요하게 여긴다. 인도의 비불교학파에서는 아트만(atman)을 말하는데 아트만은 일반적으로 ‘나’ 또는 ‘영혼’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그 밖의 비인도 종교 전통에서도 ‘영혼’에 대한 논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도 전통에서 아트만은 개인의 경험적인 측면과 무관한 독립적인 행위자라는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힌두교 전통에서는 환생에 대한 믿음이 있는데, 이 환생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죽은 사람 몸에 다른 사람의 의식이나 영혼이 들어가는 특정 형태의 비밀스러운 수행법에서도 이 개념을 발견할 수 있다. 환생이나 빙의를 인정하려면 개인의 경험적인 측면과 무관한 어떤 독립적인 개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전반적으로 비불교 인도학파에서는 ‘자아’가 독립적인 개체 또는 아트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아트만은 우리 몸과 마음과 구별되는 독립된 개체이다. 반면 불교 전통에서는 우리 몸과 마음과 구별되는 독립적인 아트만 또는 영혼과 같은 ‘나’라는 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 불교학파 사이에서는 ‘자아’ 또는 ‘나’를 몸과 마음의 집합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합의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나’ 또는 ‘자아’라고 말할 때 분명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교 사상가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의견이 있다.
많은 불교 학파에서는 최종적으로 ‘나’를 개인의 의식(consciousness)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실 우리 몸은 일시적인 실제라는 것과 시간이 지나도 지속되는 것은 개인의 의식이라는 점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입증할 수 있다. 물론 ‘자아’를 개인의 의식으로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불교 사상가도 있다. 붓다빨리타(Buddhapalita, 불호) 와 찬드라 끼르띠(Chandrakirti, 월칭) 같은 불교 사상가는 영원하고, 변치 않고, 영속적인 ‘자아’를 부정했다. 그들은 이것이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뿌리 깊은 욕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했다. 이 게송의 구절을 통해 ‘자아’의 속성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아에 관한 탐구는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다. 붓다빨리따와 찬드라 키르티가 주장했듯이 이는 형이상학적인 자아에 대한 탐구이며 일상적인 언어와 일상적인 경험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다. 따라서 ‘자아’ 즉 인간과 행위자는 순수하게 우리가 ‘나’라는 느낌을 경험하는 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보편적인 ‘나’와 인간에 대한 이해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나’라고 하는 것은 육체와 마음에 의존한 표현이라 이해되므로 우리는 육체적 정신적 관점에서 우리 존재를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찬드라 끼르띠는 『입중론 Guide to the Middle Way (tib. Madhyamakavatara) 入中論』에서 말수레를 예로 들고 있다. 말수레 개념을 분석할 때, 말수레를 구성하고 있는 부속품에서 독립된 형이상학적이거나 실제하는 말수레를 찾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이 말수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아’, ‘자아’의 본질을 분석하면 개인 또는 개체를 구성하고 있는 몸과 마음으로부터 독립된 별개의 ‘자아’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명을 가진 다른 중생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생명을 가진 다른 중생 역시 몸과 마음의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 몸과 마음의 존재는 개체를 구성하는 정신과 물질을 종합한 상태를 바탕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