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12일 자 『뉴욕 타임즈』 기고문/ 텐진 갸초
과학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습니다. 티베트에서 살았던 어린시절 나는 사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무척 궁금해했습니다. 장난감을 사면 좀 가지고 놀다가 분해해서 어떻게 조립되는지 살펴보곤 했지요. 나이가 들면서 영사기와 골동품 자동차에도 같은 호기심을 적용했습니다.
어느 순간 나는 오래된 망원경에 특별한 흥미를 느꼈고, 이 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했습니다. 어느 날 밤 달을 바라보다가 달 표면에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라고 믿었던 고대 우주론과 상반되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나는 두 은사님을 모셔다 이것을 보여드렸습니다.
하지만 망원경으로 내가 본 달은 분화구로 가득 찬 황량한 바위 더미에 불과했습니다. 4세기에 쓰여진 논서의 저자가 오늘날 글을 쓴다면 우주론에 관한 장을 다르게 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불교가 가진 믿음의 일부가 틀렸다는 점을 과학이 증명한다면 불교는 변화해야 합니다. 내 생각에 과학과 불교는 진리를 탐구하고 현실을 이해하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보다 진보된 과학으로부터 배움으로써 불교는 자신의 세계관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수년 동안 나 스스로, 그리고 내가 설립을 도운 마음과 생명 연구소를 통해 여러 과학자들을 만나 그들의 연구에 대해 토론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세계적 수준의 과학자들이 아원자 물리학(subatomic physics), 우주론, 심리학, 그리고 생물학 분야에서 나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특히 중요한 부분은 신경 과학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명상이 어떻게 뇌 기능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탐구하기 위해 승려와 신경 과학자 간의 활발한 연구 동력이 생겨났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목표는 불교의 옳고 그름을 증명하거나 사람들을 불교로 인도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종교의 맥락에서 명상의 잠재적인 이점을 연구하고 그 결과를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과 공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불교의 전통에서 나온 수행법을 과학적 방법과 결합할 수 있다면 인류의 고통을 완화하는 데 작은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협력은 이미 결실을 맺었습니다. 위스콘신 대학의 신경 과학자인 리처드 데이비슨 박사는 명상하는 라마 승려의 뇌 영상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명상하는 동안 행복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되는 뇌 영역의 활동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명상을 오래 할수록 그 부분의 활동성이 더 높아진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다른 연구도 진행 중입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신경 과학자 조나단 코헨 박사는 명상이 주의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의과 대학의 마가렛 케메니 박사는 명상이 학교 교사의 공감 능력을 개발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연구하고 있습니다.
연구의 결과가 무엇이든 나는 이러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과학과 종교가 대립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종교의 특정 개념이 과학적 사실 및 원칙과 상충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두 분야의 사람들이 지적인 토론을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상호 연결된 세상에서 우리가 함께 직면하는 도전에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첫 과학 선생님 중 한 분은 양자 이론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제자인 독일의 물리학자 칼 폰 바이츠제커(Carl von Weizsäcker) 박사였습니다. 바이츠제커 박사는 친절하게도 과학 분야의 여러 주제에 관한 교제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분의 설명을 들으면 복잡한 전체 논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세션이 끝나면 기억에 남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이츠제커 박사가 양자 물리학의 철학적 함의와 과학 전반의 윤리적 결과에 대해 우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은 인문학의 통상적인 과제를 탐구하는 것이 과학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특히 생명 과학 분야에서 과학적인 발전 방향에 윤리적 요소를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인 윤리 원칙을 언급한다고 해서 종교적 윤리와 과학적 탐구의 융합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연민, 관용, 타인에 대한 배려, 지식과 권력의 책임 있는 사용 등 우리가 인간으로서 공유하는 원칙을 포용하는 '세속적 윤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은 종교인과 비종교인 사이의 장벽을 초월하며, 특정 종교가 아닌 모든 종교에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뇌와 신체에 대한 세포 및 유전자 지식은 그 정교함에 있어 새로운 차원에 도달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의 발전으로 과학자들은 장기적인 결과를 알 수 없는 동식물의 교잡종과 같은 새로운 유전적 개체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자신의 좁은 분야에 집중을 할 때, 그들의 예리한 집중력은 때때로 그들의 연구 결과가 미치게 될 더 큰 영향을 가릴 수 있습니다. 나는 과학자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작업의 이면에 있는 더 큰 목표를 상기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입니다. 우리의 도덕적 사고가 과학 발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반면에 이러한 발전의 파급 효과는 더 이상 그와 같은 지식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이 개인의 손에 맡겨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바로 이 점이 오늘 워싱턴에서 열리는 신경 과학 학회 연례 회의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나는 과학이 전반적인 인류의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가 더 이상 학문적 관심사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제안할 것입니다. 이 같은 질문은 인간 존재의 운명을 염려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긴박감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신경 과학 분야와 우리 사회 간의 대화, 나아가 모든 과학 분야와 사회 간의 더 깊은 대화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 그리고 다른 중생과 공유하는 자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즈니스 업계가 윤리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처럼, 과학계도 자신의 연구가 갖는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해 봄으로써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능숙해지는 것 이상으로 자신의 동기와 자신이 하는 일의 더 큰 목표, 즉 인류의 발전이라는 목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