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마감하는 지금 세상은 점점 가까워지고 세계의 모든 시민들이 하나의 공동체처럼 되었습니다. 정치적, 군사적 동맹은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그룹을 형성하였고, 기업들의 국제 교역으로 글로벌 경제가 탄생하였으며, 전 세계를 잇는 통신망은 지역, 언어, 인종이라는 전통적인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인류에게 닥친 심각한 문제들은 우리가 이에 공동으로 대처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구 팽창, 자원 고갈, 그리고 공기, 물, 식물과 동물(인간과 마찬가지로 이곳 지구에 생존의 토대를 가진 생명체들)을 위협하는 환경 위기가 그러한 문제들입니다.
이 같은 우리 시대의 도전 과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보편적인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과 가족이나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해 나서야 한다는 점을 배워야 합니다. 보편적 책임감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은 세계 평화를 이루고 천연자원을 공평하게 사용하며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전하는 일에 있어 가장 좋은 토대입니다.
나는 꽤 오랫동안 상호 책임의식과 이러한 책임의식을 가져오는 이타심을 어떻게 하면 높일 수 있을까를 생각해 왔습니다. 간단하게 내 생각을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인류라는 하나의 가족
좋든 싫든 우리는 커다란 인류라는 가족의 구성원으로 이 지구상에 태어났습니다. 빈부, 학력, 국적, 종교나 이념에 관계없이 우리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인간입니다. 하나같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피합니다. 이를 추구할 권리도 동등하게 갖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가 ‘인류의 하나됨’을 수용할 것을 요구합니다. 과거에는 서로 떨어진 공동체들이 기본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여겼고, 심지어 완벽하게 고립된 채 존재했습니다. 지금은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전세계에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특정 지역에서 중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그 즉시 세계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국가, 인종, 이념을 따지고 있으면 파괴적인 부작용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같이 상호 의존적인 환경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 곧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최선이라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내가 희망을 갖는 이유입니다. 협력의 필요성은 인류애를 강화합니다. 단순히 정치적, 경제적 동맹을 좀 더 넓히는 것 보다는 오히려 각자의 진정한 사랑과 자비심을 실천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가장 안전한 기초라는 점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더욱 안정되고 문명화된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형제애, 자매애와 같은 진실되고 따뜻한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보편적 책임감
우선 내가 특정한 이념이나 운동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을 언급하겠습니다. 나는 특정한 사상이나 생각을 전파하기 위해 조직을 만드는 관행도 좋아하지 않는데, 그 그룹에 속한 사람들 만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책임을 지게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에서 제외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우리 중 누구도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가정할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보편적 책임감을 갖고 자기 몫의 책임을 져야합니다.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지는 개인의 수가 수백, 수천, 혹은 수십만 명으로 늘어나게 되면 전반적인 분위기가 크게 개선될 것입니다. 긍정적 변화는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으며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좌절하면 아주 간단한 목표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확고한 의지를 갖고 꾸준하게 밀고 나가면 아주 어려운 목표도 달성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국제 비즈니스 영역에서도 자비심이 요구될 것입니다. 경제적 불평등, 특히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가장 큰 고통의 원천입니다.
대규모의 다국적 기업들은 단기적인 손실이 있더라도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가난한 나라들이 갖고 있는 얼마 안 되는 귀중한 자원을 선진국의 소비주의를 부추기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재앙입니다. 이를 막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피해를 볼 것입니다. 취약하고 다각화되지 않은 경제가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정치적, 경제적 안정을 촉진하는 훨씬 현명한 정책입니다.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부를 축적하기 위한 욕망과 경쟁심보다는 이타심이 비즈니스의 원동력이 되어야 합니다.
현대 과학분야에서도 인간의 가치에 대한 책임감을 새롭게 다져야 합니다. 과학의 주요 목적은 현실에 대해 더 많이 배우는 것이지만 또 다른 목표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이타적인 동기가 없으면 과학자들은 유익한 기술과 단순히 편리하기만 한 기술을 구별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변의 환경 파괴는 이러한 혼란의 결과를 가장 명백하게 드러내는 사례이지만, 적절한 동기가 부여된다면 생명 자체의 미묘한 구조를 조작할 수 있는 특별하고 새로운 생물학 기술도 더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윤리적 토대를 기반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섬세한 생명의 구조에 끔찍한 해를 끼칠 위험이 있습니다.
전 세계의 종교도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종교의 목적은 아름다운 교회나 사원을 짓는 것이 아니라 관용, 아량, 사랑과 같은 인간의 긍정적인 덕목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철학적인 관점이 어떻든 간에 모두 하나같이 이기심을 버리고 남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개념을 최우선시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일부 종교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문제를 만듭니다. 서로 다른 종교를 따르는 신자들 모두가 각각의 종교는 심오한 본질적 가치가 있으며 정신적, 영적인 건강을 제공하는 수단을 갖고 있음을 깨닫아야 합니다. 한가지 음식이 그런 것처럼 한 종교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정신적 성향이 다르듯이 어떤 사람들은 한 종류의 가르침으로부터 유익함을 얻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종류의 가르침으로부터 유익함을 얻습니다. 각각의 신앙은 신자들이 훌륭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바, 종종 서로 모순되는 철학을 지지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는 이러한 점에서 성공했습니다. 따라서 분열을 조장하는 종교적 편협함과 불관용에 참여할 이유가 없으며 모든 형태의 신앙을 마땅히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해야 합니다.
이타주의의 씨앗을 더 많이 뿌려야 할 가장 중요한 곳은 분명히 국제 관계 분야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세상은 극적으로 변했습니다. 냉전의 종식, 그리고 동유럽과 구소련의 공산주의 붕괴가 새로운 역사를 열었다는 점에 우리 모두가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20세기 인간의 역사는 완전히 마무리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20세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는데, 이 기간 중 무기의 파괴력이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폭력으로 고통받고 사망하였습니다. 더욱이 인간 공동체를 찢어 놓은 이데올로기 경쟁, 즉 한편에서는 무력과 폭압적인 권력, 다른 한편에서는 자유, 다원주의, 개인의 권리 및 민주주의를 두고 싸우는 거의 종말적인 경쟁을 목격했습니다. 나는 이 치열한 경쟁의 결과가 이제 분명해졌다고 믿습니다. 평화, 자유, 민주주의라는 선한 인간 정신이 여전히 여러 형태의 폭정과 악에 직면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에서 대다수 사람들이 그것이 승리하기를 원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비극이 전적으로 해를 끼친 것 만은 아니었으며, 많은 경우에 우리 인간의 마음을 열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공산주의는 비록 이타주의를 포함하여 여러가지 고귀한 생각을 지지했지만, 통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사상을 적용하려는 시도는 재앙을 빚었습니다. 공산주의 정부들은 사회의 정보 흐름을 통제하고 시민들이 공공선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교육 시스템을 구성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처음에는 이전의 압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엄격한 조직이 필요했을 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 목표가 달성되면서 이 같은 조직은 유용한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기여할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자신의 신념을 펼치기 위해 무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성은 공산주의가 야기한 고통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무력은 아무리 강하게 행사되더라도 자유를 향한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결코 제압할 수 없습니다. 동유럽의 도시에서 행진한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이것을 증명했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알렸습니다. 그것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요구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였고 그것이 인간 본성의 핵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자유는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있어 창의성의 원천입니다. 공산주의 체제가 가정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음식, 거처, 의복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의 뿌리 깊은 본성을 지탱하고 귀중한 공기와도 같은 자유가 부족하다면, 우리는 반쪽짜리 인간일 뿐입니다. 단지 육체적인 욕구 충족에 만족하는 동물과 같을 것입니다.
나는 구소련과 동유럽에서 일어난 평화적인 혁명이 우리에게 위대한 교훈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는 진실의 가치입니다. 사람들은 개인이나 체제가 괴롭히고, 속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본질적인 인간 정신에 위배됩니다. 그러므로 속임수를 쓰고 무력을 사용하는 이들은 단기적으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전복될 것입니다.
반면에 모든 사람은 진실의 가치를 인정하며, 실제로 우리의 피 속에는 진실에 대한 존중심이 있습니다. 진실은 최고의 수호자이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진정한 기초입니다. 여러분이 약하든 강하든, 여러분의 주장에 지지자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진실은 여전히 승리할 것입니다. 1989년 이후에 일어난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이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감정인 진실 표현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정치 영역의 많은 부분에서 진실 자체가 여전히 심각하게 부족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특히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진실을 거의 존중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약자들이 더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들의 손에 고통받는 것처럼, 약한 국가는 필연적으로 더 강한 국가에 의해 이용당하고 억압받습니다. 과거에는 단순한 진실의 표현이 대개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최근 몇 년에 걸쳐 진실이 인간의 마음 속에 그리고 결과적으로 역사를 바꾸는 데 엄청난 힘이 된다는 점이 증명되었습니다.
동유럽에서 얻은 두 번째 커다란 교훈은 평화로운 변혁이었습니다. 과거 억압당한 시민들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종종 폭력에 의존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발자취를 따라 동유럽의 평화 혁명은 미래 세대에게 성공적이고 비폭력적인 변혁의 훌륭한 사례를 제공합니다. 앞으로 사회의 주요 변혁이 다시 필요할 때,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 시대를 평화적인 투쟁의 패러다임, 즉, 십여 개국, 수억 명이 참여한 전례 없는 규모의 성공적인 녹색혁명을 한 사례를 되돌아볼 것입니다. 더욱이 최근의 사건들은 인간 본성의 기저에는 평화와 자유에 대한 열망이 깔려 있으며 폭력에는 철저하게 반대한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탈냉전 시대에 어떤 종류의 세계 질서가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될지 생각하기 전에 나는 폭력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영역에서 폭력을 배제하는 것이 세계 평화에 필수적인 토대이자 모든 국제 질서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비폭력과 국제 질서
언론은 매일같이 테러, 범죄 및 폭력 사건을 다룹니다. 나는 사망 사건과 유혈 사태 같은 비극적인 이야기가 신문과 공중파를 채우지 않은 나라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언론인과 독자 모두 그같은 보도에 중독되다시피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압도적 다수는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지구에 사는 50억 명의 인구 중 실제로 폭력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최대한 평화로운 상태를 선호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는 평온을 소중히 여기며, 폭력적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봄이 오면 낮이 길어지고 햇빛이 더 많아지며 풀과 나무가 살아나 모든 것이 아주 싱그럽습니다.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가을에 나뭇잎 한 잎이 떨어지고 다른 잎이 떨어지면 아름다운 꽃들은 전부 시들고 벌거벗은 나무들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우리는 그다지 기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건설적이고 유익한 성장을 원하고 무너지거나 죽거나 파괴된 것들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파괴적인 행동은 우리의 기본 본성에 어긋납니다. 건설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의 방식입니다. 나는 우리가 폭력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한다고 확신하지만, 폭력을 완전히 제거하려면 먼저 그 일이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따져야 합니다. 엄격하게 실용적인 관점에서만 보면, 어떤 경우에는 폭력이 실제로 유용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힘으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같은 성공은 동시에 종종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행복을 희생시킵니다. 그 결과 한 가지 문제는 해결되지만 또다른 문제의 씨앗이 심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건전한 추론에 의해 자신의 주장이 뒷받침된다면 폭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기적인 욕망 외에는 다른 동기가 없고 논리적 추론을 통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는 사람들이 힘에 의존합니다. 가족과 친구들마저 동의하지 않을 때조차도 타당한 논거가 있는 사람들은 한 가지씩 사례를 들고 쟁점을 다툴 수 있는 반면, 합리적인 논거가 거의 없는 사람들은 곧바로 분노의 희생양이 됩니다. 따라서 분노는 힘의 표시가 아니라 약하다는 표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동기와 상대방의 동기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폭력과 비폭력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외부적인 요인만으로는 구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동기가 부정적인 것이라면 설사 그것이 만들어 내는 행동이 부드럽고 온화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폭력적입니다. 반대로 동기가 진실되고 긍정적이라면 상황에 따라 가혹한 행동이 필요한 경우라도 본질적으로는 비폭력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 나는 단순히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비로운 관심에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할 때만 유일하게 무력 사용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의 진정한 실천은 아직 실험적이지만, 사랑과 이해에 기초한 비폭력의 추구는 신성한 일입니다. 이 실험이 성공한다면, 다음 세기에는 훨씬 더 평화로운 세상으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을 것입니다.
가끔씩 서양 사람들이 비폭력 수동적 저항을 채택한 간디의 장기적인 투쟁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지 않으며 그러한 행동 방침은 동양에서 더 자연스럽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서양인들은 적극적이기 때문에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모든 상황에서 즉각적인 결과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접근법이 항상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폭력의 실천은 확실히 우리 모두에게 적합합니다. 단지 결단의 문제입니다. 동유럽의 민주화 운동이 목표에 빠르게 도달하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비폭력 시위는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잔혹한 탄압과 투쟁의 어려움에 직면한 중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련된 사람들이 평화를 유지하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그럴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들 젊은 중국 학생들의 대다수는 아주 가혹한 형태의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1989년 봄에는 마하트마 간디의 수동적 저항 전략을 자발적으로 실행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며, 아무리 세뇌를 받았더라도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는 평화의 길을 추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평화 지대
나는 아시아에서 티베트의 역할을 내가 이전에 언급했던 "평화의 지대", 즉 무기가 금지되고 사람들이 자연과 조화롭게 사는 중립적이고 비무장화된 성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라 티베트가 침략을 받기 전에 티베트인들이 천 년 이상 노력한 삶의 방식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티베트에서는 모든 야생 동물이 불교의 교리에 따라 엄격하게 보호되고 있습니다. 또한 적어도 지난 300년 동안 제대로 된 군대가 없었습니다. 티베트는 위대한 세 분의 왕들이 통치를 한 다음인 6세기와 7세기에 국가 정책의 도구로서 전쟁을 포기했습니다.
지역 공동체의 발전과 군축 과제의 관계에 있어, 나는 각 지역에서 하나 이상의 국가가 군대를 금지하고 평화 지대가 되기로 결정함으로써 그 지역의 "핵심 지역(heart)"이 될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이것도 꿈이 아닙니다. 40년 전인 1948년 12월 코스타리카는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최근 스위스 국민의 37%가 군대 해산에 동의하는 투표를 했습니다. 체코 슬로바키아의 새 정부는 모든 무기의 제조와 수출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민이 선택한다면 국가는 체제를 바꾸기 위해 급진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지역 공동체 내의 평화 지대는 그 지역 안정의 오아시스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공동체 내 각국이 집단 안보 비용에 대해 각자의 몫을 지불하는 동안, 평화 지대는 완전하게 평화로운 세계의 선구자이자 등대가 될 것이며 어떠한 갈등에서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에서 지역 공동체가 발전하고 군축이 진행되어 각 지역별로 연합 군대가 창설되면 이러한 평화 지대가 확장될 수 있고, 따라서 평화와 안정이 확산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새롭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좀 더 협력적인 세계를 만들기 위한 위와 같은 제안이나 다른 제안을 고려할 때 너무 먼 미래를 계획하고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 출범한 48개 회원국의 <유럽 안보 협력 회의>는 이미 동유럽과 서유럽 국가뿐 아니라 독립 국가 연합과 미국과의 동맹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 주목할 만한 사건들은 두 초강대국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위험을 사실상 제거하였습니다.
내가 현재 이 논의에서 UN을 포함시키지 않은 이유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UN의 중요한 역할과 그렇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이 아주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존립의 목적에 맞추어 UN은 어떠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든 그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UN의 구조를 수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유엔에 대해 큰 희망을 가지고 있고 비판의 의도는 없지만, UN 헌장이 만들어진 제2 차 세계 대전 직후 당시와는 환경이 바뀌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5개 상임 이사국으로 이루어진 다소 배타적인 안전 보장 이사회의 대표성을 확대하는 등 UN을 더욱 민주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결론
내가 미래에 대해 대체로 낙관적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리고자 합니다. 최근 나타나는 일부 추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우리의 크나큰 잠재력을 보여 줍니다. 50년대와 60년대까지도 사람들은 우리 인류에게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라 믿었습니다. 특히 냉전은 서로 반대되는 정치 체제는 경쟁하거나 협력할 수 없고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강화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 모두가 세계 평화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의 주장에는 관심이 없고 공존에 훨씬 더 집중합니다. 매우 긍정적인 발전입니다.
또,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엄격한 규율을 기반으로 하는 권위주의 체제만이 인간 사회를 통치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으므로 체제와 충돌하였습니다. 오늘날 어느 쪽이 이겼는지는 분명합니다. 비폭력 "시민의 힘" 운동의 출현은 폭정의 지배하에서 인류가 이를 용인하거나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 같은 인식은 놀라운 발전입니다.
또 다른 희망적인 발전은 과학과 종교 사이에 양립 가능성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세기 내내 그리고 우리 당대에까지도 사람들은 명백하게 모순된 세계관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깊이 혼란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물리학, 생물학 및 심리학에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종교의 근본적인 관심 사항인 우주와 생명의 궁극적인 본질에 가장 심오한 질문을 할 정도로 높은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따라서 보다 통일된 견해를 가질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정신과 물질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양에서는 정신을 이해하는 데 더 관심이 있고 서양은 물질을 이해하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제 이 둘이 만났으므로 생명에 대한 영적인 견해와 물질적 견해가 더욱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지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급격하게 변화한 것도 또 다른 희망의 이유입니다. 10년 내지 15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마치 무한한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자원을 소비했습니다. 이제는 개인뿐 아니라 정부도 새로운 생태 질서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종종 달과 별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우리 중 누구라도 그곳에서 살자면 꽤나 비참할 것이라고 농담을 합니다. 이 푸른 행성은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쾌적한 거주지입니다. 지구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며, 지구의 미래가 우리의 미래입니다. 지구 자체가 지각이 있는 존재라고 믿지는 않지만, 지구는 실제로 우리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며, 우리는 아이들처럼 의존합니다. 이제 대자연은 우리에게 협력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온실 효과와 오존층의 파괴와 같은 세계적인 문제에 직면할 때 단위 조직이나 단일 국가는 무력합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해결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우리에게 보편적 책임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막 배우기 시작한 교훈 때문에 다음 세기는 더 친근하고 조화로우며 덜 해로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의 씨앗인 자비심이 번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매우 희망적입니다. 동시에 나는 모든 개인이 우리 지구의 가족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도록 도움을 줄 책임이 있다고 믿습니다. 좋은 소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대규모의 시민 운동은 개개인의 자발적인 시도에서 비롯됩니다. 여러분이 큰 성과를 낼 수 없다고 생각하면 다음 사람도 낙담하여 좋은 기회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각자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타적인 동기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여기서 언급한 견해는 전 세계 수많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도 이미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불행히도 아무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내 목소리도 무시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들을 대신하여 말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달라이 라마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것이 매우 주제 넘은 일이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벨 평화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노벨상을 받고 그 상금을 내가 원하는 대로 썼다면, 수상 이전에 내가 그 모든 좋은 말을 했던 유일한 이유가 이 상을 받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이미 수상하였으므로, 앞으로도 내가 그동안 주장해 왔던 견해를 널리 알림으로써 영광스러운 수상에 보답할 것입니다.
나는 나를 포함한 개인이 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습니다. 인류 역사상 지금과 같은 커다란 변화의 시기는 아주 드물었는 바, 이 시기를 좀 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우리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