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가 핵무기 제조나 핵 폐기물 처분의 장소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티베트 국민은 모든 형태의 생명체에게 커다란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타고난 감정은 불교에 대한 믿음에 의해 강화되는데, 불교는 인간이든 동물이든 지각이 있는 모든 생명체를 해치는 일을 금합니다. 중국의 침략 이전 티베트는 독특한 자연 환경을 지닌 신선하고, 아름답고, 훼손되지 않은 자연 환경의 보고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난 수십 년 동안 대부분의 티베트 자연 환경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여러 지역에서 삼림 자원의 피해가 복구 불가능한 수준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티베트의 민감한 자연 환경에 대한 전반적인 영향은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특히 티베트의 높은 고도와 건조한 환경을 고려하면 지대가 낮고 습한 지역에 비해 삼림의 복원에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나마 남아 있는 삼림은 반드시 보존되어야 하며, 부당하고 무분별한 중국의 환경 파괴의 흐름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첫번째 우선 순위는 핵무기의 생산 금지이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핵 폐기물의 방류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공공연하게 자국의 핵 폐기물 처분뿐만 아니라, 외화 획득을 위해 다른 나라의 핵 폐기물 수입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정의 위험성은 명백합니다. 우리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에도 위험한 일입니다. 더구나 티베트 한 곳의 지역적인 문제가 전 세계적 재난으로 확산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은 인구 밀도가 낮은 광대한 지역이 존재하지만 기술 수준이 고도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에 폐기물을 처리하는 것은 단기적인 해결 방안일 따름입니다.
만일 내가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만 있다면, 아마도 환경 보호를 주장하는 정당에 투표할 것입니다. 최근 세계적으로 가장 긍정적인 진전 중의 하나는 자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신성하거나 성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지구를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집을 보존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자연에서 왔기에 자연에 거역할 이유가 없으며, 이 때문에 내가 환경 문제가 종교나 윤리,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종교, 윤리, 도덕은 우리 생존에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므로 일종의 사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을 지속적으로 거스르면서 생존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연이 균형을 잃으면 인류는 고통받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는 미래 세대를 배려해야 합니다. 깨끗한 환경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권리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받았을 때 보다 더 낫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비슷한 상태로 미래 세대에 지구를 넘겨줄 의무가 있습니다. 이는 생각만큼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겠지만 공동으로 노력해서 얻게 될 성과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방을 나서면서 전등을 끄는 일이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고 해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내가 불교 승려로서 업보의 개념이 일상 생활에서도 매우 유용하다고 믿는 이유입니다. 동기와 그 결과의 관계에 믿음을 갖게 되면, 당신의 행동이 당신과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에 더욱 주의하게 됩니다.
티베트에서 계속되는 비극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에서 수많은 선(善)을 발견합니다. 목적 그 자체로서 소비주의에 대한 믿음이 지구의 자원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식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는 점에 특별히 고무됩니다. 이러한 인식이 꼭 필요합니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지구의 자녀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아이들의 행동을 인내해 왔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는 환경과 이웃에 대한 우려의 메시지를 언젠가 중국인들에게 전달되기를 기도합니다. 중국인들에게 불교는 결코 낯설지 않기 때문에,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내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마지막 판첸 라마의 전임자는 북경에서 칼라차크라 대법회를 열었습니다. 내가 동일한 법회를 다시 갖는다고 해도 전례 없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불교 승려로서 나는 모든 인류와 고통받는 중생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중생들의 고통은 무지에서 비롯되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이나 만족을 위해 타인에게 고통을 초래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적인 평화와 만족에서 오는 바, 이는 이타주의와 자비심을 배양하고 분노, 이기주의 및 탐욕을 제거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천진난만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어디 출신이든지 기본적으로는 모두가 동등한 인간이다‘는 말을 상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똑같은 기초 욕구를 갖고 똑같은 걱정을 안고 삽니다. 각자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자유와 권리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동유럽에서부터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는 바로 이 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폭력적인 분쟁, 자연 파괴, 빈곤, 기아 등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초래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인간의 노력과 이해, 그리고 인류애에 대한 인식을 고양해야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선한 마음과 경계심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지구에 대해 보편적인 책임감을 배양해야 합니다.
불교가 자비심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종교라는 것은 알지만, 나는 이러한 자질을 키우는 데 종교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동시에 나는 모든 종교가 선의를 키우고 인류에 행복을 가져오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고 믿습니다. 수단은 다를 수 있지만 목표는 동일합니다.
과학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증하고 있는 가운데, 종교와 영성은 우리에게 인류애를 상기시켜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모순되는 일은 없습니다. 각각이 가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과학이나 불교의 가르침 모두 만물의 근본적 통일성을 알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결의를 다지게 하는 짧은 기도를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주가 존재하는 한
중생이 존재하는 한
나 또한 여기에 머물러
이 세상 고통을 없애리라.
위 글은 1990년 영국에서 발간된 『달라이 라마 자서전』 가운데 「보편적 책임감과 망명 중인 자유로운 선한 마음」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