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가르침은 본질적으로 실용적입니다. 어느 한 인종이나 국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인류를 위한 것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능력과 성향에 맞추어 그 가르침을 따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어릴 때부터 불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 86세이지만 여전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자들을 만날 때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21세기의 불자가 될 것을 권장합니다. 그러려면 법을 듣고, 읽고, 배운 것들을 깊이 사유해서 익숙해져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이후 세상은 많은 것이 변했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유효합니다. 팔리 전승 불교와 산스크리트 전승 불교 모두 무지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방법을 가르치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피하고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실천은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행복하기를 원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고통에서 해방되고 기쁨과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모든 중생이 태어날 때부터 갖는 권리입니다. 우리 자신의 행복은 대부분 우리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염려하는 마음을 키움으로써 우리는 많은 문제의 근원인 자기중심주의를 줄이고 자연스러운 기쁨의 원천인 친절한 감정을 고양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붓다는 중생의 악행을 물로 씻어낼 수 없으며, 중생의 고통을 자신의 손으로 없앨 수도 없고,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도 못한다. 오직 중생을 해방하는 진리 그 자체를 설하여 (중생이) 스스로 깨닫게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교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 중 하나입니다. 불교가 독특한 점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설법한 것을 면전에서 인정하지 말고 금 세공사가 금의 품질을 판별하듯이 검토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모든 종교적 전통은 이웃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가르치지만, 부처님은 이에 더해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세심하게 살펴서 그것이 합리적이고 유익하다고 이해될 때만 가슴에 새기라고 권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이기주의적 태도에 뿌리를 두고 마음의 평화를 방해하는 요소에 대응하는 합리적인 방법들을 알려주셨습니다. 자비심을 갖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카루나(자비심)와 아힘사(비폭력)라는 인도의 고대 전통은 육체적인 행동 지침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정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훈련되지 못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훈련된 마음이 행복이고, 제멋대로인 마음이 불행이라고 말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인도에서 살았는데, 부처님께서 행한 여러 가르침은 탁쉴라 지역, 비끄라마쉴라 사원과 및 날란다 대학 같은 배움의 중심지에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7세기에 티베트 왕은 고대 인도의 데바나가리 문자를 모델로 삼아 티베트 문자를 만들기로 결정하였습니다. 8세기에 들어 당시 티베트 왕은 인도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이론가인 산타락시타 스님을 초빙해서 티베트에 불교를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스승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지은 논전을 티베트어로 번역하는 것을 장려하였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티베트 불교 전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산타락쉬타 스님은 합리성과 추론에 근거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폭넓게 설명하는 이론들을 소개하고, 또 불교 경전에 쓰여진 내용에 대한 분석을 장려했는데 이는 유일하게 티베트 불교에만 남아 있는 학습 방법입니다. 수도승으로서 내가 어린 시절부터 공부해 온 방식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학습한 문장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해서 명상을 통해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티베트인들은 천 년 이상 이러한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도인들이 우리의 스승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배움의 이후에는 우리 나름의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따라서 오늘 인도의 형제자매들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것에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됩니다.
인도의 정신적인 전통이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이유는 인도의 전통에는 마음과 감정의 작용에 대한 깊은 이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집을 떠나 수행하면서 부처님은 당시 유행하였던 사마타(집중)와 비파사나(통찰)라는 명상법을 수련하셨습니다. 이에 기초하여 6년 동안 금식과 깊은 명상을 하는 금욕 생활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깨달음을 얻으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처님은 “나는 심오하고 평화롭고, 묘사할 수 없지만 단순하고 명료한, 꿀과 같이 달콤한 진실을 깨닫았다. 하지만 이를 가르치려고 해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이 숲속에서 침묵을 지킬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씀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직후 가르침을 시작하시어 고집멸도(苦集滅道)라는 네 가지의 진리인 사성제를 설파하셨고, 라즈기르에서 가진 두 번째 설법에서는 『반야심경』을 가르치셨습니다. 슈나타(空性)를 설명하시면서 부처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달리 아무것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 사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하셨습니다. 『반야심경』은 대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고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가르치셨습니다.
이후 중관파 (Madhyamaka) 창시자인 나가르주나(용수 보살)와 제자인 아리아데바, 찬드라키르티 같은 분들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성(空性)과 연기(緣起)’에 관해 광범위한 불경을 저술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수년 전, 인도의 위대한 물리학자인 라자 라만나 박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수 보살의 논설를 읽었는데 그 내용이 현대 양자 물리학의 견해와 부합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라만나 박사는 의식적 추론 이외에는 도움을 받을 도구가 없던 상황에서 용수 보살께서 이와 같은 현대 물리학의 발전을 예견하셨다는 점에서 같은 인도인으로서 자랑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이 살던 시대에는 인구도 작고 상대적으로 격리된 공동체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들은 더 넓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글로벌 경제 체제 안에 살고 있고, 기술이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혀 놓았습니다. 이 같은 현실은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과거 인도는 우리 티베트에게 스승이었습니다. 이제는 인도가 전통적인 지혜를 다른 나머지 세상과도 나눠야 하는 시대가 왔습니다. 인도의 전통 지혜를 대중적이고 학문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모든 정신적 전통을 존중하면서 대중적 접근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인도의 전통적인 방식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평화를 배양하는 개개인은 보다 평화로운 사회를 형성하고 궁극적으로는 보다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쁨을 찾고자 합니다. 우리는 희망에 의지하며, 희망은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지식을 적절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감각적인 느낌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에 달려 있는데, 핵심은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 것이며, 그러려면 마음과 감정의 상호 작용에 대해서 이해해야만 합니다. ‘인류는 하나다’라는 인식을 고취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한다면 보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 인도에 왔을 때, 나는 인도와 내 조국 티베트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떠올렸습니다. 인도 총리께서 말씀하셨듯이 인도는 부처님의 나라입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류에 봉사하고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 신자이든 아니든 간에, 우리가 보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카루나와 아힘사라는 검증된 원칙을 채택한다면 우리 모두가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2021년 9월 26일 「The Week Magazine」에 실린 기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