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티베트 민족 봉기 14주년_제14 대 달라이 라마 담화문
올해로 티베트에 냐트리 첸포(Nyatri Tsenpo) 왕조가 수립된 지 2,100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 민중들이 외세의 지배에 항거하여 처음으로 대규모 평화 시위를 벌인 날로부터 14년이 된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 영광스러운 날을 기념하며 우리 티베트 동포 모두의 평안을 기원합니다.
먼저, 티베트 2,100년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 보고자 합니다. 티베트 왕조는 초대부터 일곱 명의 트리(Tris), 두 명의 텡(Theng), 여섯 명의 렉(Leg), 여덟 명의 데(Dhe), 다섯 명의 텐(Tsen)으로 이어집니다. 이 스물여덟 명의 왕이 다스리는 동안 티베트에서는 수공예와 교육이 꾸준하게 발전했습니다. 불교가 처음으로 티베트에 들어온 것은 28대 라 토토리 녠첸(Lha Thothori Nyentsen) 왕조 당시였습니다. '종교적으로 가장 위대한 티베트 왕'으로 일컬어지는 33대 송첸 감포(Songtsen Gampo), 37대 티송 데첸(Trisong Detsen), 40대 티 랄파첸(Tri Ralpachen)의 재임 당시에는 티베트가 힘 있는 나라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종교 영역에서는 수많은 불교 경전이 티베트어로 번역되고 종교-문화적인 법령이 반포되었으며, 티베트인의 생활 양식도 문명화되고 사회적인 도덕 관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토지가 고루 분배되었고 여름과 겨울에 정기적으로 각 지역 대표단이 한 데 모이는 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 구조가 더욱 민주화되고 근대화됨으로써 국가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티베트의 명성이 온 아시아로 널리 퍼졌습니다.
한편, 40대 왕 랑다르마(Langdarma)는 불교 신앙을 억압하였고, 그의 재임 시절에 문화적 차원뿐만 아니라 신앙적인 차원에서도 불교가 크게 침체됩니다. 랑다르마의 두 아들이 왕위를 두고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서 티베트를 분리한 탓에 티베트 전체가 수많은 군소 호족 국가로 분해되고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변방 지역들이 티베트에서 떨어져 나가고 종교와 사회 제도가 다시 이전 수준으로 후퇴합니다.
샤캬(Sakya) 지역에서 쵸량 팡파(Chogyal Phagpa)가 등장하면서부터는 양상이 달라져, 이후 샤카 파-둡파(Sakya Pha-drupa), 린풍파(Rinpungpa), 탕파(Tsangpa)로 이어지면서 정치 제도가 재정비되고, 종교가 다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사회, 문화, 종교 수준을 전체적으로 끌어올렸어도 '종교적으로 가장 위대한 세 티베트 왕' 들이 통치하던 시절만은 못했습니다. 게다가 티베트는 지속적인 내부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5 대 달라이 라마 시절만 해도 티베트 정부의 정치적인 영향력이 컸고 티베트인들은 행복과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1949년 중화 인민 공화국이 티베트를 침공하면서, 모두가 아는 것처럼, 티베트인의 행복은 아주 먼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티베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종교적으로 가장 위대한 세 티베트 왕'이 통치하던 시절에 군사적으로도 강성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매우 풍요로웠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랑다르마(Langdharma) 이후 티베트는 수많은 군소 호족 국가로 분열되었고 이로 인해 정치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럽고 어려운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앙 정부가 강력한 힘을 갖는 실질적인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중국의 침략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으며 티베트 민족 전체가 지금 이렇게 크나큰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단순한 정치 선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티베트 민족은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서로 돕고 힘을 합쳐 자유와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티베트가 분열되고 그나마 샤카 지역에서 왕정을 정비해 가던 시기에 중국 원나라가 티베트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 후 만주 제국인 청나라가 티베트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중국의 경우, 한족이 세운 한나라에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로, 대원제국이 멸망하면서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로 이어집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면서 청나라도 무너지고 결국 중국에 공화국이 수립됩니다. 청나라가 무너지던 그 시점에 티베트도 마침내 독립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도 티베트의 일부 호족 국가는 지배층의 영토에 대한 야욕 때문에 중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주권을 포기하고 맙니다. 이러한 조약에는 진실이 철저하게 왜곡돼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그 이전 또는 그 이후 조약에 분명하게 명시되는 객관적인 사실까지도 온전히 무시되었습니다.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무력 침공과 강압에 의해 17개 동의안(17-Point Agreement)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티베트인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건대 티베트는 오랫동안 분명히 독립된 나라였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티베트의 실상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티베트가 소위 '3대 영주'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면서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 중국의 논리입니다. 중국의 자신들 덕분에 티베트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발전을 했으며 모든 인민이 행복한 나라가 되었다고 선전합니다.
우리가 지금 먼 이국 땅에서 티베트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은 티베트 민중이 행복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지배 아래 살고 있는 티베트 동포들이 정말로 행복하다면 왜 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인도 등의 망명지로 탈출을 하겠습니까? 1959년 3월 10일 항쟁 후, 1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티베트에서 고유의 문화가 폭압적으로 말살되고, 티베트 본토에 사는 동포들의 표현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는 물론 최소한의 종교적 자유와 권리마저도 철저하게 무시되는 현실은 수많은 티베트 동포들이 직접 몸으로 겪고 있는, 재론할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의식주를 누리는 것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 요소인데 노쇠한 우리 동포들은 이조차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식량 부족으로 많은 노약자들이 병들고 죽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동포들은 하루하루를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지내고 있으며 여유와 휴식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중국 정부가 선별해서 기르고 교육한 티베트 젊은이들조차도 배운 바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직업을 얻지 못합니다. "자율 봉사"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사람들을 들판과 도로 건설, 공사 현장으로 가축 부리듯 내몰고 있습니다. 티베트 땅에 살고 있는 티베트인들은 사람 취급도 못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도 티베트인들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기본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개개인의 차이는 약간 있을지 몰라도, 그 누구도 외부 침략자의 거짓 선전을 믿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은 자신의 나라를 자신의 힘으로 꾸려 나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권리와 자유를 위해 계속 싸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오늘 티베트의 역사와 티베트 민족이 품은 열망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이 안타까운 상황이 결코 오래 계속될 수 없음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동안 국제 사회에는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국의 지도자들도 지금과 같은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좀 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더 이상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 함께 티베트인의 정당한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건설적인 노력을 계속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모두가 만족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노력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티베트 동포 여러분, 우리 모두 굳은 결의와 하나된 마음으로 힘을 합쳐 운명을 개척해 나갑시다.
달라이 라마
1973년 3월 10일